생태적일 수도 있을 뻔뻔한 설 요리 둘- 밀전병 & 한 입 볶음밥

2010. 2. 16. 09:15My-ecoKitchen

-독일에서 오랜만에 보낸 다운  설  이야기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한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다들 나 말고는 다른 한국인들을 찾아볼 수도 없는 곳에 살았었다. 독일에 와 처음 3년간을 지낸 에버스발데(Eberswalde)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베를린에서 기차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이면서까지 그런 모임을 찾아다닐 만큼  한국인들과의 교류에 목 말라있지 않았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하느라 꽤 바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사를 한 게르바흐(Gerbach)는  살고 있는 가구 수가 400가구도 안 되는 워낙에 작은 마을로, 근처 50-60 킬로미터 이내 다른 마을과 도시를 다 합쳐서도 내가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작년 가을, 이곳에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들른 마트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가족을 만난 적이 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들이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말을 걸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서로 갈 길을 가게 된 사연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로이트(Bayreuth)에는 한국인들이 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학교 내에 갑자기 알게 된 한국어 수업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다니엘 한국어 선생님을 통해서 한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선 민족의 대명절 설이었던 어제, 바로 모임이 있었다. 설에는 다들 떡국을 먹는 한국과 달리 여기선 각자 준비해 오고 싶은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 와 차려 놓고 나눠 먹는 모양이었다. 독일어 선생님 말씀으론 다들 고기를 준비해오니, 채식을 하는 나와 남편이 먹을만한 걸로 집에서 자주 해 먹는 것을 준비해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정말 집에서 먹는 대로 삶은 감자에 야채볶음 혹은 밥하고 김치에 국- 뭐 이런 걸 들고 갈 수도 없을 것 같아 고심했었다. 그러던 중 언젠가 한 요리 블로거가 소개한 손님 접대에 좋은 밀쌈이 생각났다. 여기에 볶음밥을 과자틀에 찍어내 한 입 요리를 해 만들고, 자우어크라우트 샐러드를 곁들이면 좋겠다 싶었다. 마쳐야 할 작업이 있어, 모임 전날에는 장만 봐다 놓고, 약속시간인 오후 2시 모임 가기 전 오전에 음식을 만들었다.


 뭐, 준비해 간 음식이 모임에선 별로 썩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었다. 또 (빛깔이 다채로와 그랬는지) 다들 음식이 예쁘다며 좋아해 주셨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고맙고 기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론 뭔가 마음 한구석에서 떨쳐내지 못한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준비해간 음식이 자우어크라우트 샐러드를 제외하곤 전혀 생태적이지 않은 요리였기 때문이다. 만든 시기와 사용한 재료에 따라선 전혀 다른, 생태적인 제철 요리라는 빛나는 이름을 붙여 줄 수도, 그리하여 내 마음도 한 점 부끄럼 없이 떳떳했을 수도 있었으련만.

 

설날 한인 모임에 준비해 간 음식

설날 한인 모임에 준비해 간 음식- 사진 바로 가까이에 보이는 두 가지 색 밀쌈과 한 입 볶음밥. ⓒ 김미수

 

위와 같은 긴 사연을 바탕으로 이름 붙여진, '생태적일 수도 있을 뻔한 파티 요리 둘- 밀전병 & 한 입 볶음밥'을 소개한다.

 


하나, 밀쌈 만들기

밀쌈은 밀전병(밀지짐이)을 얇게 부쳐서 오이, 버섯, 고기 등을 채 썰어 볶아 넣거나 깨를 꿀로 버무려 소를 만들어 넣고 말아 놓은 떡이다.

말이 떡이지 메밀 전병 등 다른 전병류와 같이 사실 부침개에 좀더 가까운 상차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에 넣는 소에 따라 안주나 후식으로 먹는다는데, 찾아보니 요즘 사람들은 손님맞이 상차림에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여기서 소로 자주 이용하는 고기나 달걀 등의 속재료를 모두 식물성으로만 바꾼다면, 근사한 채식 밀쌈이 된다..

(두산백과사전 밀쌈, 전병, 메밀전병 참조) 

 

내가 사용한 밀쌈의 재료들

내가 사용한 밀쌈의 재료들- 생태적이지 않은 뻔뻔한 야채들에서 부터 친환경 착한 야채들 까지. ⓒ 김미수



내가 쓴 뻔뻔한 야채들 vs. 착한 야채들

빨간 파프리카- 시댁을 떠나올 때 어머님이 싸주신 야채. 스페인산이나 최악에는 이스라엘산으로 추정.

양송이- 지인에게 선물 받은 떨이 야채. 독일산.

애호박- 시댁을 떠나올 때 어머님이 싸주신 야채. 스페인산으로 추정.

브로콜리- 시댁을 떠나올 때 어머님이 싸주신 야채. 스페인산으로 추정.

오이- 밀쌈 요리재료를 보고 마트에서 집어든 스페인산. (가장 가까운 마트만 재빨리 다녀온 터라 평상시와 다르게 그 곳에 있는대로 그냥 집어 들었다.)                                                 

 

단호박- 수확시기인 늦가을에 사서 저장해 둔 독일산 유기농.

양파- 수확시기인 늦가을에 사서 저장해 둔 독일산 유기농.

당근- 늦가을에 사서 저장해 둔 독일산 혹은 오스트리아산 (여기선 그나마 근처) 유기농.

적색 양배추- 늦가을에 사서 저장해 둔 독일산 유기농.

 

밀가루- 상당히 많이 정제한, 내가 거의 백밀가루 동급으로 치는 밀가루. 유기농

스펠트 밀(Triticum spelta, 영어명: Spelt, 독어명: Dinkel)- 통곡식 가루. 독일산. 유기농

흑미가루- 엄마가 고향에서 농사 지으시는 사촌 고모님 댁에서 사서 보내주신 흑미 한 보따리 중 조금을 직접 분쇄. 유기농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음. 한국에 있었다면, 그나마 지역농산물이었겠지만, 이곳에선 원거리 수입 농산물의 위치. 스스로에게 마음의 위안을 조금 준다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제품이란 것과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밀전병을 위한 두 가지 색 반죽

밀전병을 위한 두 가지 색 반죽- 밀가루와 물의 비율은 1:1.5 정도가 적당하다. 하지만, 만들어보니 전병이 자꾸 쳐져서 밀가루를 좀 더 넣어 반죽을 되게 만들었다. ⓒ 김미수

 

각각의 채소들을 길고 가늘게 채를 썰어 취향에 따라 생으로 쓰거나 아주 조금의 기름을 넣고 볶아 쓴다.

중요한 점은, 김밥에 넣는 재료와 마찬가지로 물기 없이 표면이 약간 건조한 상태가 좋다. (기름이 많거나 자체의 물이 나와 재료가 소스나 물기로 젖어 있으면, 쌈을 말았을 때 쳐지거나 심지어 떠질 수도 있다.)


내 경우엔 오이를 껍질 있는  단단한 쪽만 얇게 썰어서 생으로, 피프리카 역시 머리와 꽁지 부분을 잘라내고 최대한 일자로 얇게 썰어 내 생으로 사용하였다. 나머지 재료들은 채를 썰어 불에 볶아 내고 소금 간 하였다. 브로콜리는 꽃부분(대 아닌 진한 녹색의 윗부분)만 작게 썰어 역시 살짝 볶아 사용했다.

 

야채 준비는 써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요리초보라도 문제없을 정도로 참 간단하다. (그런데 준비하다보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밀쌈 성공의 최대 변수는 밀전병 지지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나는 테플론 프라이팬을 쓰지 않아 집에 있는 것들은 죄다 스테인리스 제품뿐이라 처음부터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사실 전날 점심으로 두어 개를 시범 삼아 만들어 봤는데, 그때는 100% 흰 밀가루만 써서 그랬는지 별 무리없이 밀전병을 지져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당일 큰 문제가 생겼다. 전날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있었기에 몸에 좋다는 스펠트 밀가루를 30% 정도 섞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인지?- 만드는 족족 팬에 눌어붙어 엉망이 되었다.

 

약속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계속 시도하다가 이대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묘안을 낸 것이 바로 오븐용 기름종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오븐용 기름종이를 프라이팬 크기로 잘라 달궈진 팬에 놓고 그 위에다 반죽을 부어 익혔다. 얇고 동그랗게 부친 밀전병을 김밥 마는 발 위에 놓고, 각각의 재료를 한 두개씩 소로 올려 김밥 말듯이 꼭꼭 말아준다.


직접 기른 새싹채소를 곁들인다면 좋았겠지만, 시댁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새싹을 기를 시간이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 한 입 볶음밥 만들기

야채는 위의 재료 남는 것들을 다지듯 작게 썰어 사용한다. 나는 밀쌈 만들 때 사용한 재료 중 오이, 적양배추, 파프리카 양송이를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감자를 사용했다.

적색 양배추는 밥에 물이 들면 지저분해 보일까 봐 뺏고, 파프리카와 양송이는 정신없이 만들다가 깜빡 잊고 넣지 못 했다. (생오이는 볶음밥엔 안 어울려서 미사용.)

 

밥은 쌀 대신 수수와 퀴노아 등을 섞은 잡곡밥에 약간의 간을 하고, 기름을 한 숟가락 넣고 했다. 처음에 밥할 때 부터 거친 옥수수 가루를 반 컵 못되게 넣고 함께 끓였는데, 이는 나중에 모양 틀에 찍을 때 모양이 유지되도록 밥의 점도를 더하기 위해서였다.

 

볶음밥 재료를 보면,

주요 야채들- 위와 동일

감자- 독일산 유기농

 

수수- 유기농, 원산지는 알 수 없음.

퀴노아(Quinoa) 흰색+ 붉은색 두 종류- 유기농 공정무역 제품.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공정무역가게에서 사둔 것.

 

위의 재료로 야채를 양파-당근-감자-단호박-브로콜리-파프리카 순으로 팬에 볶다가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밥을 넣고 골고루 섞고서, 맛을 보며 소금을 더 한다. 불을 끄고 숟가락이나 주걱으로 조리가 끝난 볶음밥을 꼭꼭 눌러 놓는다. 여기에 여러 가지 과자 틀로 찍어내면 완성. 이때 과자 틀은 한입에 들어가기 좋을 크기-가장 작은 크기의 틀이 적당하다.

 

한 입 볶음밥

한 입 볶음밥- 별 것 아닌 요리지만, 모양틀에 찍어내면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근사한 파티요리가 된다. ⓒ 김미수

 

사실 밀쌈을 만드는데, 참고한 요리법에 달걀, , 맛살 같은 것들을 썼기에, 뭔가 야채 외의 것을 곁들이면 사람들 먹기에 더 나으려나 싶어 마트에서 덥썩 집어든 대두식품(Sojaprodukt)이 있었다. 콩으로 만든 기다란 소시지였다. 장을 볼 때 정신이 없었는지 성분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덥석 사놓고, 그날 당일 요리를 하려고 살펴보니 계란에서 추출한 단백질이 들어 있었다. (나와 남편은 비전-Vegan인데, 평소에 고기, 유제품, 꿀 등의 모든 동물성 제품을 제외한 식물성 식품만을 섭취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것은 빼두고 야채만으로 밀쌈을 말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날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요리 형편없이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걱정이 되었었는지 뭔가 잔뜩 긴장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생전 안 하던 장보기를 좀 하게 되었는다. 요리할 때는 워낙 시간에 쫓기고 바쁘게 준비해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내놓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지난 이틀을 떠올려 보면, 혼자 중심을 잃고 좀 우왕좌왕한 것 같다.

 

다행히 모임은 잘 끝났고, 처음 보는 분들인데 다들 친절하고 다정하셨다. 그리고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마트에서 마주쳤던, 그 가족분들. 그때 그분들이 나를 보시고는 혹시 한국인이 아닌가 싶어 일부러 나 들으라고 한국어로 좀 크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남편이랑 둘이서 독일어로만 이야기하고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으니, 그분들은 '한국인 아닌가 보네...'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사실 난 그때 딴에는 기회를 엿보느라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건데....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우습다. 그냥 바로 가서 말 걸어 볼걸.

 

독일에 온 이후 음력 설은 특별한 일 없이 그냥 넘어 가곤 했는데, 음식준비에서부터 같은 지역에 사는 다른 한국인들과의 만남까지. 오랜만에 우리 설을 명절다운 명절처럼 보낸 것 같다.

 

 

밀쌈 요리 참고 (문성실의 이야기가 있는 밥상- '손님 접대 요리(밀총떡, 호박버섯볶음)'

업데이트 된 '(밀쌈말이) 먹기 전에 눈이 먼저 호사하는 요리')